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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는 서부 개척 시기 뉴멕시코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총잡이 무법자였습니다. 1875년 그의 나이 16살 때 중국세탁소에서 옷을 훔친 일이 범죄사고를 일으킨 시작이었습니다. 이 일로 체포되어 감방에 가두었으나 굴뚝을 기어올라 탈출한 이후 카우보이로 살아가면서 21살 되는 해 1881년 7월14일 보안관에 의해 피살되기까지 살인과 투옥과 탈출을 반복한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미국 서부 개척 시기에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진 것은 미국의 수수께끼라고 뉴멕시코 디스커버리 가이드(New Mexico Discovery Guide) 책을 집필한 Don and Betty Martin은 말하고 있습니다.
빌리 더 키드에 관한 책과 수필집이 1,000권 이상 출판된 것은 서부의 무법자인 그가 얼마나 유명하고 미국 사람에게서 관심의 대상이 됐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시, 노래, 음악과 발레 작품, 40편 이상의 영화도 빌리 더 키드를 주제로 발표됐습니다. 빌리 더 키드가 죽은 지 140년이 지났지만, 뉴멕시코를 찾는 여행객 중에는 많은 사람이 옛날 이곳에서 활약했던 빌리 더 키드의 발자취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부 개척 시기가 풍기는 향수를 빌리 더 키드의 발자취에서 느끼며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빌리 더 키드의 본명은 윌리엄 헨리 매카시 주니어(William Henry McCarty, Jr.)였습니다. 그는 1859년 11월 17일 뉴욕에서 아일랜드 가톨릭 혈통인 캐서린(Catherine)과 패트릭 매카시(Patrick McCarty)의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남동생인 조셉(Joseph)은 1863년에 태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빌리가 네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캐서린과 두 아들은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캐서린과 두 아들은 1968년 인디애나로 이사했고 거기서 윌리엄 앤트림(William Antrim)을 만나 함께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 가족은 캔자스로 이사한 뒤 다시 콜로라도 덴버에 잠시 살았고, 1973년 캐서린이 폐결핵으로 건강이 나빠 저서 건강을 위해 날씨가 좋다는 뉴멕시코 산타페로 이사하고 캐서린은 5년간 동거해 온 앤트림과 산타페 제일 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약 한 달 후 이들 가족은 뉴멕시코 남서부에 있는 실버 시티(Siler City)로 이사 했습니다. 빌리 더 키드의 다섯 번째 이사였습니다.
빌리의 어머니 캐서린의 건강은 더 나빠지더니 1974년 9월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두 아이는 의붓아버지 윌리엄 앤트림과 살게 되었으나 얼마 후 의붓아버지 조차 빌리와 조셉 두 아이를 버리고 애리조나로 떠나버려 빌리와 동생은 고아가 되었습니다.
빌리의 무법자 행각의 시초는 1975년 그가 16살 때 실버 시티에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세탁소에서 옷을 훔친 일로 기소되어 감방에 갇힌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잡힌 지 이틀째 되는 밤에 굴뚝을 타고 기어 나와 탈옥을 한 것이 실버 시티 헤랄드 신문에 보도가 되어 그에 대한 첫 이야깃거리가 됐습니다.
빌리는 애리조나로 도망가서 호텔 드 루나(Hotel de Luna)에서 요리사로 일했다고 합니다. (1877년 부터 그는 자신을 “윌리엄 H 보니(William H. Bonney)”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877년 그곳에서 만난 존 맥키(John Mackie)라는 말 도둑과 함께 범행을 저지르다가 잡혀 포트 그랜트(Fort Grant)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빌리는 그날 밤 감옥을 탈출하여 탈출의 예술가로서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8월 포트 그랜트에서 자기를 괴롭히던 프랭크 케이힐을 말다툼 끝에 총으로 쏴 죽이는 범행을 저질러서 애리조나에서 수배자가 되어 뉴멕시코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뉴멕시코로 도망친 빌리는 링컨 카운티 (현재 Chaves 카운티)의 페코스(Pecos) 강의 지류인 리오 펠릭스( Rio Felix) 강가에 있는 존 턴스톨(John Tunstall)의 목장에서 그의 카우보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링컨 카운티는 뉴멕시코의 약 1/4의 면적을 차지하는 미국 내에서 가장 넓은 카운티였고 이곳에 1850년경 히스패닉 주민이 라 프라시타 델 리오 보니토(La Placita del Rio Bonito :The Place by the Pretty River)라는 마을을 세웠는데 1869년에 마을 이름을 링컨(Lincoln)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링컨 마을에 두 비즈니스가 인근 포트 스탠턴(Fort Stanton) 군부대에 쇠고기 납품 계약과 링컨 마을에서 경영하는 상점을 통해 상권의 경쟁으로 서로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경쟁자의 한 그룹은 영국에서 이민 온 사업가 존 턴스톨과 그의 사업 파트너인 알렉스 맥스윈( Alex McSween)이었고 다른 그룹은 링컨 카운티의 상권을 10년 전부터 지켜온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업가인 로런스 머피(Lawrence Murphy)와 제임스 돌런(James Dolan)이었습니다.
로런스 머피는 1878년 2월 18일 마을 보안관 브레이디(Brady)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상권 경쟁자인 턴스톨에게 상거래 문란 혐의를 씌워 턴스톨을 체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보안관이 존 턴스톨을 체포하려던 과정에서 존 턴스톨은 보안관이 쏜 총에 맞아 죽게 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에 격분한 주인을 잃은 빌리와 동료들은 레귤레이터(Regulator)라는 이름의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머피 – 돌란(Murphy-Dolan) 측의 사람을 살해하기 시작했고 4월1일 에는 링컨 마을 한복판에서 보안관 브래디에게 12발의 총격을 쏟아부어 그를 살해했습니다. 링컨 카운티의 두 비즈니스 간의 갈등은 결국 링컨 카운티 전쟁(Lincoln County War)으로 비화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머피-돌런의 상점은 파산되었고 (상점 건물은 카운티에 매각되어 법원 건물로 사용되었음) 턴스톨은 죽었지만, 전쟁은 점점 격화되더니 1878년 7월 15일에는 전쟁의 정점을 찍은 5일간의 링컨 전투(Battle of Lincoln)를 하게 되었습니다. 빌리 더 키드가 속한 무장단체 레귤레이터는 머피-돌런의 무장단체에 밀리게 되어 맥스윈(McSween) 집에 갇힌 상황에서 총격전을 했으나 머피-돌런의 무장팀이 집에 불을 지르는 데 성공하게 되어 도망 나온 맥스윈은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빌리 더 키드와 친구들은 화염 속에서도 무사히 탈출하였으나 결투를 포기하고 흩어졌습니다. 이 전쟁으로 머피와 돌런 두 사람도 살해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끝났고 빌리는 포트 섬너(Fort Sumner)란 떨어진 마을로 가서 정착했으나 몇 달 후 그는 패트 개릿(Pat Garrett)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산타페(Santa Fe)로 이송된 다음 매실라(Mesilla)로 이송되어 브래디(Brady) 보안관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뉴멕시코 주지사로 부임한 루 윌리스(Lew Wallace)는 링컨 카운티에서 벌어진 전쟁 사건의 주모자들이 자수를 하면 사면해 주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이때 빌리는 윌리스에게 자수의 편지를 보냈고 윌리스도 그를 사면해 주려 했으나 지방 검사가 주지사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그에게 사형을 구형, 판사도 이를 받아들이며 사형이 선고되었다고 합니다.
빌리 더 키드는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이전에 머피-돌런의 상점이었던 링컨 카운티 법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처형 예정일 며칠 전에 빌리는 자기를 경비하던 경비원 한 명의 총을 빼앗아서 살해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위해 길 건너편 워틀리 호텔이 가 있었던 두 번째 경비원은 총소리를 듣고 서둘러 법원으로 달려왔습니다. 빌리 더 키드는 법원 2층 창문에서 이중 총신 산탄총으로 그를 쏘아 죽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법원 발코니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간단한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보안관을 살인했다는 누명을 덮어 썼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그는 재판을 받은 유일한 링컨 카운티 전쟁 참가자였습니다) 빌리는 누군가가 그를 위해 안장을 얹어 준 말에 올라타고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처럼 천천히 여유 있게 마을을 떠났습니다.
이때의 기사가 뉴욕 타임스에 실리면서 빌리 더 키드에게 미 서부 제일의 무법자라는 타이틀이 붙게 됐습니다. (사진은 빌리가 사형수로 잡혀있었던 당시의 링컨 카운티 법원입니다.)
뉴멕시코 주지사 루 윌리스는 살인자 빌리 더 키드를 체포하기 위해 $500의 현상금을 주겠다는 포스터를 내걸었습니다.
도망을 간 빌리의 수명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멕시코로 도망치거나 적어도 뉴멕시코 밖으로 도망치질 않고 포트 섬너(Fort Sumner) 주변에 머물렀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사는 세뇨리타 ( ‘아가씨’에 해당하는 스페인어) 한 두 명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 그곳에 머물렀던 이유로 추정됩니다. 옛날의 친구였던 보안관 팻 개릿(Patrick Garrett)이그를 추적해서 포트 섬 너로 갔고 우연히 목장 주인 피트 맥스웰(Pete Maxwell)의 집에서 그를 어둠 속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알아볼 수 없는 밤이었으나 맥스웰과 함께 제삼자가 있음을 알고 빌리는 스페인어로 누구냐( ¿Quién es?)라고 소리를 내자 보안관은 말소리만 듣고도 빌리라는 것을 알아채리고 권총으로 두 발을 쏘아 빌리를 사살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먼저 죽은 두 친구의 옆에 다음날 묻혔습니다.
포트 섬너에 있는 그의 무덤에 세워진 묘비는 1951년에 도난당했는데 26년 뒤에 텍사스에서 되찾아왔고 1981년 두 번째의 도난을 당했으나 4일 후 캘리포니아 헌팅턴비치에서 되찾아왔습니다. 이로 인해서 1981년 5월 묘비를 철장 속에 가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감방을 드나들었던 빌리 더 키드는 죽어서도 오늘까지 철장 안 감옥 무덤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빌리 더 키드의 생애에서 몇 안 남은 유물 중 하나는 1879년 말 또는 1880년 초에 찍은 2 x 3인치(5.1 x 7.6센티미터)의 폐로 타입 사진입니다. 사진 이미지는 빌리가 조끼를 입고 헐렁한 모자를 쓰고 1873 년 윈체스터 소총을 잡고 있습니다. 2011년 6월, 원본 사진은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경매에서 230만 달러로 사업가 윌리엄 코흐(William Koch)에게 팔렸습니다.
포트 섬너에 있는 그의 무덤에 세워진 묘비는 1951년에 도난당했는데 26년 뒤에 텍사스에서 되찾아왔고 1981년 두 번째의 도난을 당했으나 4일 후 캘리포니아 헌팅턴비치에서 되찾아왔습니다. 이로 인해서 1981년 5월 묘비를 철장 속에 가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감방을 드나들었던 빌리 더 키드는 죽어서도 오늘까지 철장 안 감옥 무덤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빌리 더 키드의 생애에서 몇 안 남은 유물 중 하나는 1879년 말 또는 1880년 초에 찍은 2 x 3인치(5.1 x 7.6센티미터)의 폐로 타입 사진입니다. 사진 이미지는 빌리가 조끼를 입고 헐렁한 모자를 쓰고 1873 년 윈체스터 소총을 잡고 있습니다. 2011년 6월, 원본 사진은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경매에서 230만 달러로 사업가 윌리엄 코흐(William Koch)에게 팔렸습니다.
미국 작곡가 애런 코플랜드(Aaron Copland)는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란 제목의 발레를 위한 조곡을 링컨 커스타인(Lincoln Kirstein)의 의뢰로 1938년 작곡했습니다. 로데오(Rodeo), 애팔래치아의 봄(Appalachian Spring)과 함께 코플랜드의 가장 인기 있고 널리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빌리 더 키드 조곡에서는 여러 카우보이 곡과 미국 민요를 포함한 것으로 유명하며, 비록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의 인물과 활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지만, 무법자의 생애를 표현하면서도 빌리와 같은 인물이 생생한 역할을 한 개척지 서부의 “와일드 서부(Wild West)”를 표현하는데 무게를 둔 곡입니다.
이 곡은 아래와 같이 8개의 에피소드 장면을 소제목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 소개: 넓은 초원(Introduction: The Open Prairie)
- 서부 개척 마을의 거리 풍경(Street Scene in a Frontier Town)
- 멕시코 댄스와 피날레(Mexican Dance and Finale)
- 초원의 밤(밤의 카드 게임, 빌리와 그의 연인) Prairie Night (Card Game at Night, Billy and his Sweetheart)
- 총격전(Gun Battle)
- 축하(빌리를 체포한 후) Celebration (After Billy’s Capture)
- 빌리의 죽음(Billy’s Death)
- 넓은 초원 반복(The Open Prairie Again)
유튜브에서 ‘빌리 더 키드 발레 조곡’ 듣기
위의 링크를 클릭하면 빌리 더 키드 발레 조곡의 5번 총격전을 표현하는 타악기 연주 부분에서 시작해 들을 수 있습니다. 애런 코플랜드(Aaron Copland)가 작곡/지휘한 런던 심포니 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