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멕시코의 역사

옛날의 뉴멕시코는 아나사지 (Anasazi) 인디언들 만이 살던 땅이었습니다. 서기 800년에서 1300년 사이에는 아나사지 인디언이 뉴멕시코 서북부에 있는 챠코케년지역을 중심으로 도시를 형성해서 차코 문명 (Chaco Culture)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챠코케년지역에는 5층 건물을 위시해서 대형 건축물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1276년부터 1299년 사이에 있었던 심한 가뭄으로 그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도시를 버리고 리오 그란데 강가로 내려와서 소 집단을 이루는 푸에블로(Pueblo)를 형성해서 농사를 위주로 하면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챠코 케년지역에 있는 푸에블로 보니토(Pueblo Bonito)의 상상도

서기 1500년경에는 캐나다 지역에서 살던 나바호 (Navajo)와 아파치(Apache) 인디언이 뉴멕시코로 이주해 내려왔습니다. 나바호 인디언은 푸에블로의 서쪽 지역에 목축을 주업으로 정착했고 아파치 인디언은 남부, 동부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스페인은 지금의  멕시코시티(Mexico City) 지역을 정복하여 식민지 국가,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영어로 번역하면 New Spain)를 세우고 총독을 보내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총독은 지금의 뉴멕시코 지역에 시볼라(Cibola)라는 일곱 도시가 있는데 길바닥을 금으로 장식할 정도로 부유한 도시라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총독은 1539년 마르코스(Marcos) 신부를 단장으로 하여 원정길을 가게 했습니다.  원정팀이 뉴멕시코의 쥬니 (Zuni) 인디언 마을에 왔을 때 일행 중 하나가 인디언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자 일행은 도주해서 멕시코 시티로 돌아와서  총독에게 보고 하길  사볼라라는 도시는 멕시코시티보다 몇 배나 큰 도시였다고 과장해서 허위 보고를 했습니다.

총독은 이듬해 1540년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Francisco Vázquez de Coronado)

장군에게 부대를 이끌고 뉴멕시코에 있는 쥬니 인디언이 사는 곳에 가서 이 사실을 알아보라 고했습니다. 코로나도 장군이 이끄는 일행은 쥬니 인디언 마을에 와서 보고는 시볼라(Cibola)라는 황금의 도시는 근거 없는 헛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도비 집에 운모로 된 창을 썼는데 저녁 햇빛에 반사되는 빛이 금색으로 보여 금으로 장식된 도시로 소문이 난 것으로 믿어진다고 합니다.  코로나도는  쥬니 인디언 마을에 머물어 있는 기간에 부하  카르데나스(Cárdenas)가 이끄는 탐색대를 구성하여 호피 인디언 안내자를 따라 쥬니 북쪽에 있다는 콜로라도강을 찾아가게 하였습니다. 

약 20일이 걸려서 도달한 곳이 지금의 그랜드 케년 남쪽 가장자리였습니다.  탐색대는 그랜드 캐년과 콜로라도강을 본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습니다. 카르데나스는 세명의 부하에게 콜로라도강까지 다녀오라고 보냈지만 사흘동안 캐니언 절벽을 내려가는 것을 시도한 끝에 포기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코로나도 원정팀은 다시 동진해서 지금의 앨버커키 북쪽에 있는 버나리오(Bernalillo)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강가에 도달했고 이듬해 지금의 켄자스 지역까지 답사했으나 소문으로 들은 황금의 도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도시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도의 부하인 알바라도(Alvarado)다 이끈 원정팀이 버나리오근처에서  1540년겨울을 나는 동안 티웨쉬(Tiguex)[발음:TEEwesh] 인디언과의 마찰이 전쟁으로 발전되어 미 대륙에서 인디언과 유럽인 사이 전쟁으로서 역사 기록에 오른 전쟁으로는 최초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티웨쉬 인디언은 메사 언덕위 요새 위에 몰려서 스페인 군인의 공격을 80일간은 막아 냈으나 물과 식량이 떨어지자 항복 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에 참여한 인디언 남자는 전원 사살되었고 여자들은 노예가 됐습니다.

약 40년이 지난 뒤 1598년에는 스페인 왕 필립 2세의 명에 의해서 오냐데(Oñate) 장군이 이끄는 본격적인 북방 개척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리오그란데 상류 지역에 스페인 이주민이 정착하게 했고 인디언들에게 기독교를 선교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를 거부하는 인디언의 세력도 컸습니다.  아코마(Acoma) 인디언들과의 갈등으로 10여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보복으로 800여 명의 인디언을 죽이고 살아남은 인디언도 25 세이 상의 남자들은 전부 그들의 발목 하나를 잘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때의 잔인한 사건은 누에바 에스파냐 정부에 알려져서 1606년 오냐테는 멕시코로 소환 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아코마 푸에블로 인디언에게 “과잉 무력”을 사용한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아  스페인으로 추방되었습니다.

1610년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상그레 데 크리스토( Sangre de Cristos)산 밑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이름을 산타페(Santa Fe)로 지었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수도(Capital City)가 이때 된 것입니다. 산타페(Santa Fe)는 스페인어로 거룩한 믿음(Holy Faith)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인디언 땅을 식민지로 삼고 인디언의 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썼습니다. 푸에블로 인디언은 그 반발로 포페이(Popé 혹은 Popay)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합하여1680년 8월 10일 일제히 봉기하여 성당을 불 사르고 사제를 죽이는 반란을 일어 켰고 이로 인해 400여 명의 스페인 사람은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지금의 엘파소 지역으로 도망쳤습니다. 포페이는 그 후 스페인 군인들의 두 차례에 걸친 공격을 막아 내긴 했으나 인디언 부족을 연합 시키는 일에는 힘이 부족했고 1692년 디에고 데 발가스(Diego de Vargas)는 스페인 군인150명과 우호적 관계를 가진 인디언 다수를 거느리고 다시 산타페에 무혈로 입성하여 인디언 지도자들과 평화적인 협상을 맺고 산타페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들어갔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과거의 실패를 되푸리 않으려고 식민 정책은 보다 더 온건한 정책으로 바뀌었고 기독교도 인디언에게 전 해지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200여 년이 지난 뒤 1821년,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누에바 에스파냐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멕시코라는 이름으로 독립국가를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뉴멕시코는 그때부터는 멕시코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은 25년 동안만 지속되고 바뀝니다. 1846년 멕시코와 미국 간의 영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슈테펜 커니 (Stephen Kearny) 장군은 멕시코군의 큰 저항도 받지 않고 지금의 뉴멕시코의 라스베이거스(Las Vegas)까지 들어와서는 광장 옆에 있는 어도비 집 지붕 위에 올라가 서 “이제부터는 뉴멕시코는 미국 땅이다”라는 선언을 했습니다. 이후 2년 뒤 정식 조약 문서에 의거 이곳 뉴멕시코는 미국의 영토가 되어 인디언, 히스 페닉에 이어 앵글로 세 혈통이 함께 뉴멕시코의 거주민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의 영토가 된 이후 이곳 인디언은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바호 인디언과 미국인 서부 개척자 사이에 마찰이 커지더니 갤럽 (Gallup) 지역에 살고 있던 인디언을 300마일 떨어진 페코스강이 있는 포트 섬너 (Fort Sumner)로 강제 이주시킨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계획을 반대한 나바호 인디언은 완강히 맞서 싸우다가 애리조나주에 있는 케년 디쉐이(Canyon de Chelly )로 도주하여 숨어버리자 킷 칼슨(Kit Carlson) 대령이 지휘하든 군인들은 곡식과 민가를 불태우고 가축을 잡아 죽이는 보복을 가해서 나바호 인디언의 항복을 받아 내고 강제 이주를 하는 장거리 행진, 롱 워크 (Long Walk)를 하게 하였습니다.


300마일 되는 먼 길을 겨울철에 8,000여명의 인디언은 걸어서 이동하는 가운데 200여 명이 기아와 추위로 인해 죽었습니다. 새로 마련한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농사를 짓고 새로운 개척을 하려 했으나 토지와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서 계속 기아와 질병으로 많은 인디언이 죽어갔습니다. 결국 4년 뒤 1868년 미국정부에서는 이 계획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연방정부와 나바호 지도자들 사이의 보스크 레돈도 조약(Treaty of Bosque Redondo)을 1868년 6월 1일 포트 섬너에서 체결하였습니다. 농사에 필요한 종자 공급, 농기구 공급,  나바호족의 권리, 철도 및 요새 건설, 부족에 대한 보상, 나바호 어린이를 위한 교육제공, 고향으로 복귀 지원등이 합의되었습니다.

뉴멕시코는 신개척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카우보이를 위시해서 광부, 철도공사 노동자, 노름꾼과 각종 상인들이 늘어나면서 범죄도
늘어나 무법천지가 되는 듯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장군은 조크로 말하길, ‘미국은 멕시코와 다시 전쟁을 해서 골칫거리의 뉴멕시코를 도로 가져가게 해야 된다’라고 말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빌리 더 키드(Billy the Kid)는 이 당시 무법 천지의 서부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차츰 질서를 회복하면서 1912년 1월 5일 드디어 뉴멕시코는 미국의 47번째의 주로 승격됩니다. (애리조나주는 한달 뒤 2월 14일에 가입했습니다) 미국 영토가 된지 62 년 만에 합중국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뉴멕시코의 좋은 날씨가 폐결핵 치료에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요양원 시설이 앨버커키에 늘어났습니다. 한국인으로1930년에 한경직 목사가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한후 폐결핵 환자로 이곳에 와서 요양하고 완쾌되어 귀국했고1948년에는 한국 기독교 방송사장을 지낸 전성천 목사도 프린스톤 신학교 유학생 시절에 이곳에 와서 10개월 요양을 받고 석사 과정에 복귀했었습니다.

뉴멕시코의 자연 풍경에 매력을 느끼고 많은 화가, 사진작가, 저술가 등이 산타페와 타오스에 몰려왔습니다.  넓은 평지가 많은 이곳은 공군기지를 만드는 데 좋은 조건이 여서 이 차 대전 시기에 세 개의 공군기지(Kirtland, Cannon, Holloman)가 들어섰습니다.

화이트 샌즈 미사일 시험장도 생겼습니다. 험한 계곡이 있는 산속에 비밀유지하기 좋은 조건을 갖춘 로스 알라모스 (Los Alamos)에 세워진 연구소에서는 오펜하이머가 이끈 연구진이 원자탄 개발을 전쟁중에 마첬고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남부 화이트샌즈 (White Sands) 미사일 시험장 내의 광야지대에서 최초의 원자탄을 터뜨리는 시험을 하여 핵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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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 대전 때에 참전 용사들 중에 나바호 인디언은 암호병(Code Talker)으로 활약하여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미국군은 일본 사람이 나바호 말을 알지 못하는 점을 이용해서 나바호 말로 암호에 대신해 써서 미국군의 기밀유지를 할 수 있었고 일본군은 끝내 암호를 해득 못한 것입니다.

한국전쟁때 이곳 뉴멕시코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갤럽(Gallup)에 사는 일본인 2세인 히로시 미야무라(Hiroshi Miyamura) 씨는 한국전쟁 때 동료 군인을 위해 기관총 사수로 중공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운 공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한국동란 때 뉴멕시코주 인구는 지금 인구의 1/3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한국전에 파병한 뉴멕시코 출신 군인은 2만 명이나 됩니다. 그중에 189명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뉴멕시코의 산업과 경제가 크게 성장 하면서 미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컴퓨터 산업의 중요한 몫을 담당한 마이크로소프트 ( Microsoft)가 초기에 설립이 된 곳이 뉴멕시코에 있는 앨버커키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와 알버커키에 있는 센디아국립 연구소(Sandia National Laboratories)는 미국의 안보에 관련 되는  무기 시스템에서 우주, 항공, 컴퓨팅, 원자력 에너지등의 연구개발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는 1만6천명(2023년), 샌디아연구소는 1만3천명(2024년)의 직원을 가진 연구소로 성장했습니다. 1980년에 개장한 인텔(Intel)의  리오란쵸(Rio Rancho) 공장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침을 제조하는 공장 중 하나입니다. 2024년 1월에 인텔은 3차윈(3D) 패키징 새 기술을 도입한 패브9(Fab 9) 공장을 완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2023년 기준으로  2,1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으나 약 700명의 직원을 2024년에 신규 채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영화산업도 크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앨버커키 스튜디오는 넷프릭스(Netflix)의 촬영 허브가 되었으며 NBC 유니버살(Universal)과 같은 국제 미디어 제작 회사를 이곳에 유치해 왔습니다. 최근에 아마존(Amazon)과 페이스북(Facebook) 회사의 시설도 뉴멕시코에 자리잡고 운영중에 있습니다.

뉴멕시코는 인디언, 스페인 그리고 앵글로 문화가 혼합된 타주가 갖지 않은 다양한 색깔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 지금도 미국의 발전에 기여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는 주가 되고 있습니다.